2009/10/11 23:10

1930년대 초반의 일본 국내상황에 대해서 아주 간단히...^^// Military History



DC inside 2차 세계대전 갤러리에서 스펀지 송 님이
'30년대 일본 국내 상황에 대한 질문' 이란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주로 경제 대공황 등으로 인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주 사변, 그 이후의 중일 전쟁까지 일어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요.

물론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야 말로 많은 일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경제와 함께 다른 측면도 좀 살펴봐야 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머 저도 아는건 별로 없지만 만주사변이 발생했던 1930년대 초반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나는 데로 조금 써보기로 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어지는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휩쓸기 전 일본은 이미 금융위기를 겪게됩니다. 일본의 금융산업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던데다가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피해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발생된 거액의 대출은 부실화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부실채권들은 제대로 대손상각 및 감액손실 처리 등을 실시하지 않아서 일본 은행의 재무구조는 그들의 재무제표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취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1927년 봄이되자 몇몇 은행들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만은행의 고객중의 하나인 스즈키 상점이 1927년 파산을 선언하자, 당장 대만은행의 예금주들은 예금을 인출하여 이 은행의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연쇄작용을 일으켜 일본의 여러 은행들의 예금주들이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는 이른 바 뱅크 런(bank run)이 일어나며 27년 4월~5월의 3주 사이에 수십개의 은행이 지급불능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 1927년의 일본판 뱅크 런, 도쿄 저축은행 앞에 예금을 인출하기위해 몰려온 사람들 ]


이렇게 중소규모의 은행 수십개가 망하는 상황속에서 오히려 일본 재벌계 은행들은 이를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미쓰이, 야스다, 스미토모, 미츠비시 같은 재벌 계열사들은 금융업 뿐만 아니라 각 산업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사이 재벌과 이와 유착한다고 믿어지던 정치인들에 대한 적개심 내지 반감은 일반 대중들 뿐 만 아니라 우익 쪽에서도 더욱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다시 글로벌 차원의 빅 랜덤(?)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과 일본의 경제/사회적 위기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주식 가격은 대폭락 했습니다. 이를 시발점으로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 경제위기의 여파는 일본에서도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마저도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 몰려온 투자자들, "이보게 도대체 무슨일이 난건가?" ]


당시 집권당이던 민정당(民政党)의 수상 하마구치는 이 경제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중요한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첫번째는 국내 물가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수출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통화공급을 줄이고, 재정지출을 축소했습니다. 두번째는 국제무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고정환율제, 다시말해 금본위제로 복귀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작년의 금융위기로 인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접해보셨던 분들이시라면, 먼가 좀 방향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디플레이션이 휩쓸게될 이 경제 대공황에서 이 조치들은 한마디로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전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은 일본 국내 물가의 하향안정화로 인한 효과를 상쇄했으며, 금 본위제로 복귀하여 환율이 고정되자 수출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자국 엔화를 평가절하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일본의 재벌들은 다시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각종 내부정보 등을 통하여 일본이 조만간 고정환율 제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이들은 막대한 양의 엔화를 달러화로 환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이 금 본위제를 포기하며 엔화가 달러화에 대해서 50%이상 평가절하되자 손쉽게 자신의 돈을 두 배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재벌들의 행태는 일본 국민들 사이에 만연했던 '자본주의자들과 이들과 결탁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시련은 일본의 농민들에게도 닥쳐왔습니다.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속에서 쌀과 보리같은 곡물들의 가격은 43% 폭락했고, 소규모 지주들은 세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소작농에게 맡겼던 일부 경지를 자신들의 가족 노동력을 이용해서 경작하여 이번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작농들은 자신들이 경작하던 토지에서 쫓겨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기간 동안 소작쟁의는 급증하게 됩니다.

[ 1920년대 경작지 사이를 이동하고 있는 일본의 소작농 가족들의 모습 ]

[ 1930년 니가타현에서 발생한 소작쟁의의 모습 ]


또한 주로 도시지역에 집중된 소규모 상인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고객들인 노동자들의 임금이 인하되고 실업율이 치솟자 소매상인들의 도산도 2배 이상 급증하게 되었고, 신문들에는 빛을 갚지 못해 야반도주한 상점 주인들의 이야기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 거리에서 인형을 팔고 있는 소상인의 모습 ]


이런 경제위기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의 중산층들은 당시 일본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会)와 민정당(民政党)을 '자본주의의 개'라고 비난하면서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계층에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정책을 정치인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한편 당시 일본의 중소기업인들은 '자본과 노동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합니다. 실업률이 15~20%로 추정되는 당시 상황에서 이들은 점점 적대적으로 변해가던 노동자들과 대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언급했던 소작쟁의와 마찬가지로 노동쟁의도 그 빈도수 뿐 만 아니라 폭력성도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여성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는데, 특히 토요 면직물 공장의 파업에서는 수백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합세하여 야간 행진을 벌이던 중 돌맹이를 투척하며 경찰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신문들에는 '시가전' 이라는 제목으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호전적인 투쟁에 대한 놀라움을 나타내는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 토요 면직물 공장의 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 ]


그런데 일본 사회를 놀라게 한 여성들은 이 호전적인 여성 노동자들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모던 걸'들은 이 시기 다른 모습으로 사회에 충격을 주게됩니다. 당시 일본 주요 도시에 있던 카페와 댄스홀에서 근무하던 여급들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매춘'에 종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주 수입원은 손님들이 주는 팁 이었습니다. 그리고 업소의 주인들은 그들에게 에로틱한 분위기를 유도하거나 단골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유도 하였습니다. 1929년 조사에서 이들 여급들의 수는 50,000명으로 등록된 매춘여성들의 수를 초과하였으며, 1936년에 경찰은 다시 여급의 수를 111,000 명으로 추정했습니다.

[ 아마 이런 이미지로 변질되기 시작한 모던-걸...-_-;; ]


어찌됬건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은 경제적 위기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전통 사회의 규범과 도덕 등도 급격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위기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사회의 엘리트 계층 뿐 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매우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감은 곧 다른 반동을 낳게 됩니다.


난국의 타파 :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

앞 서 말씀드린 위기감은 군부와 그들의 연합세력인 민간 우익세력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젊은 장교단들은 1920년대 동안 정부의 외교 및 국내 정책에 실망하고 있었으며, 삭감되는 군사 예산과 자신들의 특권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재벌과 결탁된 정당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군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분노로 인한 가장 파급력 있는 반동은 군부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 군부의 독자적인 움직임의 메카는 바로 관동군일 것입니다. 관동군은 이미 1928년 만주에 세력을 가진 군벌 장쭤린을 기차를 폭파시켜 암살하며, 당시 일본 민간정부가 만주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유도했습니다. 비록 당시 일본의 수상 다나카는 만주에 군사력을 투입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여러 경로로 압력을 받아 이 사건을 일으킨 군부 책임자를 강력히 처벌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불길한 전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관동군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시와라 칸지는 앞으로 불가피하게 일어날 미국과 일본의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풍부한 자원이 있는 만주지역의 점령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의 가치는 이런 전략자원의 확보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시와라 칸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만주를 이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닌 사회적 평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기본 원리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일종의 시험장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 이시와라 칸지, 1934년에 촬영된 모습 ]


따라서 1931년 만주사변을 거쳐 1932년 설립된 명목상의 독립국가 '만주국'은 서구의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뇌내망상을 하고있던 일본의 계획 수립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상을 펼쳐보일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중들도 1931~32년에 걸친 만주국의 탄생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만주지역의 획득은 당시 만연하고 있던 실업의 해소를 통해 국가 전체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선전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가들의 제국주의와는 그 의도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 졌고, 일본 국민들은 대중가요, 가부키,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메뉴 등을 통하여 자신들이 새롭게 차지한 풍부한 자원이 있는 만주를 일본 제국이라는 왕관의 보석으로 열렬히 찬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주사변은 일본의 외교 및 국내 정책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일본제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기 보다는 새로운 확장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 국내 정치의 안정보다는 새로운 폭력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이미 몇 번의 민간 정치인과 재벌 기업인에 대한 군부 및 우익세력으로 부터의 암살을 경험했던 일본이었지만, 1932년 5월 15일 젊은 해군장교 집단이 당시 수상이며 정우회(政友会)의 총재였던 65세의 이누카이 츠요시를 암살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일본의 의회정치는 일단 막을 내리게됩니다.

    
끝으로.....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촉발된 위기는 일본에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경제적 측면에 가장 큰 충격을 주었지만, 어찌보면 더 중요한 것은 이로인해 일본인들은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소임을 다하며 평화롭고 평등하게 사는 전통적 농업사회 - 아마 실제했다기 보다는 상상속에서만 존재했을 - 의 이상적인 사회규범과 도덕 등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기 위해 결탁한다고 여겨진 재벌 기업가들과 민간 정치인들에 대한 염증을 토양으로 삼아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경제도 중요한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 일본의 파시즘 -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의 도래는 경제 위기와 더불어 농촌과 도시노동자의 계급 갈등, 여성들의 자각, 좌익과 우익의 대립, 전통적 관념의 파괴에 대한 우려 등등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성과 갈등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후일의 시점에서 보면, 당시 일본이 선택한 길은 누구보다 그들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 군국주의가 거의 모든 일상생활 - 심지어 여성의 패션에 조차 - 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풍자한 1936년 잡지 도쿄 퍽 (東京 パック)의 삽화 ]



[ 참조자료 ]

Andrew Gordon, A modern history of Japan, 142~143p, 182~203p
W.G. Beasley, Japanese imperialism 1894-1945, 175~219p
Andrew Gordon, 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 237~269p

덧글

  • 함부르거 2009/10/11 23:25 # 답글

    1930년대는 경제, 정치,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격변이 일어난 시기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일본은 그 격변의 와중에 최악의 선택을 한 거구요.
    저는 요즘 일어나는 일들이 그 시대와 유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의 위기, 새로운 정치질서의 대두, 신흥강국의 융성 등등 비슷한 점이 많아요.
    결국 전쟁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 Orca 2009/10/11 23:28 #

    요즘은 경제적 네트워크로 하도 얽히고 섥혀서 전쟁나면 이득 볼 사람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걱정은 너무 안하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_-;;
  • 瑞菜 2009/10/11 23:42 # 답글

    오오 대근좌, 알기 쉬운 설명에 경배 드립니다.(넙죽)
  • Orca 2009/10/11 23:56 #

    아니 전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부끄럽죠...

    에니웨이 일본에서 하시는 일 잘 되기를 빌겠습니다...^^
  • 瑞菜 2009/10/12 02:25 #

    아니오, 먹고 살기 힘들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단지 보따리 장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혹 일본 책이나 논문 필요하면 이글루에 연락 주세요.
  • Orca 2009/10/12 21:15 #

    에니웨이 머니머니 해도 건강이 최곱니다.

    바쁜 와중에도 몸관리는 잘 하시기를.....
  • 고귀한도적 2009/10/12 00:24 # 삭제 답글

    딱 공산주의가 먹힐만한 시점인거 같은데'ㅅ'
    당시 일본제국내의 공산주의 활동은 별로 없었나요?
  • Orca 2009/10/12 07:53 #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쓰려니 좀 복잡하네요.....^^

    30년대에는 위험사상으로 분류되서 활동이 위축된답니다...
  • 라라 2009/10/12 01:14 # 답글

    다카하시 대장상이 515 때 같이 암살되던가요? 226이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대단한 인물이더군요, 경제 정책 분야에서,

    감탄할 정도로..그대로 진행 됏다면 어댓을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 Orca 2009/10/12 07:55 #

    226때 암살될겁니다.

    결론적으로 케인즈의 도움없이 케인즈식 경제 정책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한 사람이죠.
    적극적인 재정확대......ㄳ
  • 이동욱 2009/10/12 01:44 # 답글

    자잘한 오류 : 미츠비시=이와사키 입니다. 당시 미츠비시 총수일가의 성이 이와사키이고, 이와사키의 문장과 출신지역 영주의 문장(어느동네인지는 까먹음..)을 섞어서 만든게 미츠비시 마크죠.
  • Orca 2009/10/12 07:56 #

    아 지적 감사드립니다 수정하겠습니다...^^
  • B군 2009/10/13 04:54 #

    구 토사번...^^;;
  • 들꽃향기 2009/10/12 12:22 # 답글

    격변의 시기에 대한 대응이 결국 보수적인 반동으로 귀결되었다는 정평에 공감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Orca 2009/10/12 21:15 #

    잘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 B군 2009/10/13 04:29 # 답글

    대단하십니다;;; 저런 지적 장애자를 상대로 이런 친절한 글을 써 주신다니요;;; 반드시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나 - 물론 지금은 조금 저 진화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만... - 비슷한 주제의 글을 몇년 전 써본 제 경험상 스펀지송님은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만한 지능을 가지지 못하신 분입니다(...)
  • Orca 2009/10/13 21:34 #

    머 저도 평소에 관심있는 주제라 나름 정리하는 차원에서도 함 써봤습니다...^^

    그런데 2대겔에 스폰지송 님이 다시 올린 글을 보니 '경제'쪽 으로 생각이 더 굳어지셨군요...
    (이번 글은 망한글...??)

    하긴 29년 경제 대공황 부터 31년 만주사변까지 써놨으니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30년대 중반 상황도 써야하나?...ㅠㅜ)

    제 의도는 만주사변 발발에는 경제 말고 다른 요인도 살펴봐야한다 요거였는데 말이죠...^^;;
  • 동쪽나무 2009/10/13 19:23 # 삭제 답글

    DC인사이드는 왠지 중학교같은 분위기라 잘안가게 되더군요
  • Orca 2009/10/13 21:34 #

    아 그래도 나름 독특한 분위기라 재미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 나그네 2009/12/29 06:24 # 삭제 답글

    지나가다 한마디 하면..
    재정구조로 보면 이미 대공황 이전에 전시경제로의 발걸음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카하시 재정상 시절에 국채를 중심으로 한 채권비가 20%에 이르기 시작하는데 중일전쟁 시작쯤에는 채권의존없이는 재정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문제는 지금과 다르게 당시의 일본은행이 적극적인 매입 operation을 실시해 주었다는 것과 발행국채의 반 이상이 미츠비시 미쯔이등의 군수산업 발전에 쓰여진다는 것이죠.
    군국주의를 만들었던 당시의 제국주의 극우 군부세력들이 여기에 결탁하고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주장, 전쟁확대를 밀고 나갈 수 있던 하나의 큰 받침돌이 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해결은 패전후에 이 천문학적으로 팽창된 채권의존형 재정적자를 강제적으로 탕감해 주었다는 것이죠.
    지금의 일본의 누적적자도 거의 당시와 유사하다는 사실도 재미있네요. 강제탕감이 없는 다음에야 마지막 해결책은 다시 전쟁으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세계 의존형 채권발행이라 일본은행 매입 operation도 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 2012/01/30 21: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Orca 2012/02/01 12:52 #

    머 역사란게 결정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정치적 역학은 그들에게 가장 파멸적인 방향으로 움직인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