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26일
Ukraine, June 1941 - 6월 22일 "우리는 공격받고 있다!!!"
전 포스팅에서는 개소전 직전 불과 3시간 전 티모셴코, 주코프, 그리고 바투틴 장군 3명에 의해 작성된 동원계획이 각 사령부에 전송된 상황까지를 알려드렸습니다.
과연 그 후, 그리고 독소전 개전 첫 날 키예프 특별 군관구에서 이미 남서전선군으로 전환되어있었던 우크라이나 방면 소련군에게는 어떤일이 있었을까요?
궁금하신 분들은 이어지는 내용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 우크라이나 지역 전투의 독일 및 소련의 전투서열을 참조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가능합니다.
http://note100.egloos.com/4955513 (독일군 전투서열)
http://note100.egloos.com/5002739 (소련군 전투서열)

남서전선군으로 전환된 후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사령부를 타르노폴(Tarnopol) 방면으로 이전하고 있었으며, 키예프에는 몇몇의 암호 해독요원들과 통신 장교들이 남아서 모스크바와의 통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모스크바의 긴급한 경보를 수신한 시간은 41년 6월 22일 0100시 경 이었으며, 이 내용은 일단 암호해독 절차를 거친후 다시 암호화되어 타르노폴(Tarnopol)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한번의 해독절차를 거친 후 키르포노스와 정치장교 바슈긴이 이 통신의 중요도에 대한 평가를 마친 다음에야 다시 암호화되어 남서전선군 산하 각 군(軍)에 발송되었다.
이러한 각 단계마다 이루어졌던 암호화 및 해독절차는 소중한 시간을 잡아먹는 요인이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각 군(軍) 단위에의 전달시각도 균등하지 못햇다. 결과적으로 제5군은 이 통신을 0230시에 송신하였으나, 제12군 및 제26군은 0400시에 수취하였으며 제6군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다수의 소련군들에게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아군의 사이렌이 아니라 독일군의 포탄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군은 알 지 못했지만 독일의 주공은 소련 남서전선군 제5군의 좌익에 집중될 예정이었다. 그 중 국경지역의 블라디미르-볼린스키(Vladmir-Volynskiy) 방면과 소칼(Sokal) 방면에 독일군의 기갑부대는 돌파를 시도할 것이며, 한편으로 코벨(Kovel) 방면으로의 조공도 포함될 것이다.

한편 독소간 국경지역을 가로지르는 자연 하천들은 방어자에게 지형의 이점을 제공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의 공격이 수월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 하천에 놓여진 교량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는 이 지점들에서 아마도 독일과 소련의 최초의 교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방면 전투에 참여했던 참전용사들의 기억에는 밤이되면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의 하천 주변에서 어둠을 뒤덮을 정도로 들려오던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공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독소전 개전전 며칠동안에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도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각종 기갑차량들의 엔진소리를 완전히 가려주지는 못했다.
국경지대의 교량을 지키던 NKVD(내정인민위원회) 소속의 국경경비대 병사들은 다리를 건너오던 GAZ-AA 트럭의 모습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보았을 것이다. 소련과 핀란드의 겨울전쟁을 통하여 독일은 다수의 소련군 장비와 군복을 입수할 수 있었으며, 특수임무를 맡은 브란덴부르그 코만도(Brandenburger Commando)들은 소련군의 장비로 완벽히 위장한 체 국경지대로 접근했다. 짦은 총성과 섬광이 울리며 이 독일의 특수부대는 다리 건너편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일부 대원들은 교각밑으로 들어가 폭발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 서쪽의 아군에 신호를 보내자, 브란덴부르그 코만도에 의해 확보된 교두보를 강화하기 위하여 장갑차량들이 내달려 왔으며, 공병대는 전차의 통행을 가능하게 하기위해서 교각의 강화작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동쪽 지평선이 아스라히 밝아오자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은 소련의 비행장, 통신센터, 그외 각종 군사시설을 목표로하여 국경너머로 날아갔으며, 0300시 독일 포병의 대규모 준비 사격이 실시되면서 독소전의 개막을 본격적으로 알려주었다.
독소전 개전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여러가지 경고신호가 도달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독일군을 자극하지 원하지 않았던 스탈린의 엄격한 명령으로 인하여 소련의 장교 및 장병들은 전장에 대한 주도권을 처음부터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선의 많은 소련군 장교들은 다음과 같은 급박한 전문을 상급제대에 보냈다.
"우리는 공격받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독일군의 각 주공방면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블라디미르-볼린스키(Vladmir-Volynskiy) 방면
독일의 특수부대들이 국경의 교량들을 장악하고 주둔지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블라드미르-볼린스키 근방에 주둔하고 있던 제41전차 사단의 병사들은 마치 벌들과 같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차량 집합소에 있던 전차들과 차량들은 하나 둘 씩 빠져나가 사전에 계획된 집합장소로 향하기 시작했으나, 사단의 포병 연대는 견인차량이 오직 4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옴짝 달싹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구형의 BT-2 (2개의 기관총 포탑 탑재형)를 이용해서 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 와중 제41전차 사단의 사령부에서는 그들이 소속된 제22 기계화군단 내지는 제5군과 통신을 시도하였으나, 상급제도로 부터는 아무런 명령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편 국경에 위치한 제41 차량화 소총 연대로 부터 들어온 라디오 통신은 이미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편 국경지방의 제87소총사단으로 부터도 긴급한 지원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독일군의 포성이 들리자마자 사단장 아랴비셰프는 포성이 울리는 방향으로 자신의 부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했으며, 제41전차사단도 제82전차 연대를 이 소총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시켰다.
그러나 제41전차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북쪽의 코벨(Kovel)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개전전 계획된 제41전차사단의 집결예정지가 코벨 이었으며, 상급 제대로부터 아무런 명령이 도달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계획이 제41전차사단이 따라야할 유일한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국경지대 방어를 위해 출동하던 제87보병사단의 병사들은 독일 공군의 끊임없는 폭격에 노출되어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없었으며, 국경지대를 방어하고 있던 것은 몇몇 보병대대와 국경수비대 소속의 병사, 그리고 사단장 아랴비셰프가 자신의 책임하에 미리 이동시켜 놓았던 포병 1개 포대 뿐이었다.
브란덴부르크 코만도가 확보한 교두보와 이를 강화하기 위해 건너온 수색대대의 뒤를이어 독일 제298보병사단의 주력이 진격이 개시되자 곧 여기저기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소련군은 마을의 좁다란 골목과 미리 배치되었던 포대의 직접사격에 힘입어 독일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독일 포병의 효과적인 대포병사격이 실시되자 포대는 침묵에 빠졌으며, 국경지대의 벙커들도 독일 전투공병의 화염방사기와 폭약에 의해서 하나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0900시, 점점 더 많은 제87소총사단의 병사들이 전장에 집결되기 시작하자 곧 사단장 아랴비셰프는 제212 곡사포 연대의 직접사격과 제41전차사단에서 지원된 제82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으며 진격하는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남쪽과 동쪽, 양쪽에서 실시할 수 있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그 남쪽에서는 독일의 제44보병사단의 고무보트를 사용한 도하작전이 실시되고 있었다.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동사단은 도하 후 약5마일을 더 진격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 교두보를 따라서 제14기갑사단은 진격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들은 소련의 제87소총사단과 제124소총사단의 전투지경선 사이의 방어되지 않은 간극을 발견했다.
이 간격을 통하여 독읠의 제14기갑사단, 제44, 299보병사단은 산발적인 소련군의 저항을 제압하며, 그날 1700시가 되면 소련 제87소총사단의 측면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포위될 위험에 빠진 제87소총사단에는 이 간격을 메꿀수 있는 예비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27소총군단으로부터 제23, 제135소총사단이 이 간격을 방어하기위해 출동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고 제87 소총사단장 아랴비셰프는 현 위치를 고수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지원은 없었고 제87소총사단은 포위당한다.)
6월 22일 저녁, 제41전차사단의 병력 대다수는 집결예정지인 코벨(Kovel)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제22 기계화군단 및 제5군과의 연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제87소총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했던 전차들은 비록 독일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미 스페인 내전에서도 경험했지만 경장갑의 T-26전차는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쉽사리 관통당했던 것이다. 한 전차대대는 50대의 T-26 전차중 30대를 상실했다.
어느사이에 짙은 어둠이 블라디미르-볼린스키에 깔리기 시작했지만, 자동화기의 예광탄과 포격의 섬광은 여기저기서 밤하늘을 찢어내듯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 많은 국경지대의 벙커에서 소련군들은 오지 않을 구원을 기다리며 절망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국경수비대의 초소 13번은 포위된채로 11일간 최후의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저항했다.
소칼(Sokal) 방면
제87소총사단의 좌익에 위치한 제124소총사단의 주력은 국경에서 24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제124소총사단이 국경지대에 방어선을 확립하기 전에 이미 독일의 4개 보병사단은 소칼을 점령하고 있었다. 곧이어 1000 독일 제11기갑사단은 수색대대를 선두에 세우고 진격을 개시했으며, 이들이 후방으로 진입하자 국경지대의 소련군의 방어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우익에 위치한 제87보병사단과 마찬가지로 제 124소총사단도 이들을 저지할 힘은 없었다. 국경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재배치가 예정되었던 제135소총사단은 6월 20일 국경지대로의 행군을 시작했지만 아직 6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결국 전방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독일의 기동집단들은 제87, 제124소총사단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코벨(Kovel) 방면
비록 독일의 주공 방향은 아니었으나, 북쪽의 코벨 방면에서도 소련의 제15소총군단과 독일의 XVII(제17)군단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제45, 62 소총사단의 주력은 국경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0500시 까지 국경수비대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0800시 제45소총사단은 독일 제56보병사단의 전면공세가 시작되었고, 제62소총사단도 역시 (같은 이름인) 독일의 제62보병사단의 공격을 받고있었다. 결국 22일이 저물무렵 제 45, 62 소총사단은 동쪽으로 서서히 후퇴를 개시한다.

남서전선군 사령부의 상황
국경지대의 소련군이 목숨을 바쳐가며 독일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을 무렵, 남서전선군 사령부의 장교들도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암호화 절차를 지키고 있었으며,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은 해독되고, 평가를 거친 후 다시 암호화되서 전달되는 과정에서 정보의 흐름에는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소전 개전이전에 미리 침투한 독일의 코만도들과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 조직 (OUN, Orhanizatsiya Ukrayins’kykh Natsionalistiv) 대원들은 빈약한 소련의 통신시설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으며, 이는 개전 초반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한편 독일의 주공방향이 아니었던 제12군 및 제26군로 부터는 국경지대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보고가 도착하였으나, 제5군 및 제6군과는 사실상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러던 중 1030시 제5군으로 부터 최초의 보고가 라디오를 통하여 도착했다.
남서전선군 사령부는 모스크바에 전황보고를 1500시까지 실시해야만 했으며, 불충분한 정보를 통해서 제5군과 제6군의 전투지경선 사이로 독일군이 침입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는 여러가지 상황을 오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었다. 그들의 보고서는 제5군 방면으로 독일 4~5개 보병사단 및 1개 기갑사단, 제6군 방면으로 독일 3~4개 보병사단이 공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보고 당시까지 블라디미르-볼린스키 및 소칼 방면으로 독일의 2개 기갑사단이 이미 돌파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 최고 사령부의 지령3호가 남서전선군에 도착했다.
- "헝가리와의 국경지대에서 굳건한 방어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제5군과 제6군은 류블린 방면으로 5개 기계화 군단과 남서전선군의 항공전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실시한다. 이 반격의 목표는 블라드미르-볼린스키 - 크리스토노폴 축선으로 진격하고 있는 적 집단을 포위, 궤멸하기 위한것이며, 류블린의 점령은 6월 24일 까지 완료한다."
이 보고서를 받은 시점에서 추가적인 정보를 다시 입수하고 있던, 남서전선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자신들의 최초 보고서가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후회를 하게된다. 아직도 각 휘하 제대와의 연락은 원할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전황파악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 국경지대를 유지하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국경너머 8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류블린이란 곳은 마치 달처럼 꿈속에서나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직 스탈린의 대규모 군숙청은 소련 장교들의 뇌리에 깊숙히 박혀있었다. 명령에 불복종 한다는 것은 NKVD에 의한 재빠른 처형과 동의어였다. 이런 압박속에서 키르포노스 상장(上裝)과 그 휘하의 참모들은 자신들의 기계화군단들에 의한 반격작전을 23일 2200시에 실시하기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남서전선군 정치장교인 바슈긴은 이 반격 명령에 기뻐하고 있었으나, 남서전선군 참모장교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무었보다도 각 제대간 연락이 원할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 기계화군단 합동 반격작전의 지휘 및 통제는 불가능했으며, 항공우세를 확립한 독일 공군은 이동하거나 집결지에 모여있는 소련의 기갑차량들을 지속적으로 폭격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잘 준비되지 않은 섣부른 반격은 오히려 자살행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To be continued -
[참조자료]
The Bloody Triangle: The Defeat of Soviet Armor in the Ukraine, June 1941, Victor Kamenir, 75~123 P
# by | 2009/07/26 22:58 | Советский танк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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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소련의 정치장교라는 직위는 참 신기하군요
역시 스탈린이 우파숙청우파숙청(자기는 극우파인 주제에)를 외치다보니
저런 현실에 눈을 못뜨는사람까지 정치장교로 갈 수 있군요
크흑. 일본에 온 뒤로 인터넷때문에 고생했스빈다(_ㅜ);
블로그에 쓰신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우리나라가 최고로 살기좋은 곳이라는 말씀에는 100% 동의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