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12일
Ukraine, June 1941 - 점점 고조되는 긴장
오랜만에 연재를 진행하네요.....
예정대로 이번에는 독소전 개전 직전,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에서 급박히 돌아갔던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어지는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히틀러와 독일의 고위 장성들이 바바로사 작전을 입안할 당시 그들은 국경지대에 집결하게될 대규모 병력들이 장기간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병력의 집중과 이를 수송하게될 철도차량의 움직임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감추어야 할 것은 병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병력들이 모인 이유가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 동부에 집결되고 있던 독일의 대규모 병력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영국 공군의 행동 범위에서 벗어난 곳에서 부대들의 재편과 휴식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1940년 10월 12일 공식적으로 취소된 바다사자 작전(Unternehmen Seelöwe)에 대한 훈련이 1941년 봄부터 다시 재개되었으며, 영국 정찰기의 감시가 가능한 장소에서 실시된 육상부대의 훈련과 동시에 독일 공군의 정찰기들은 순전히 그들의 적의 눈에 띄기 위하여 영국 상공으로의 출격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일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바바로사 작전의 준비는 곧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소련에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도 독일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으며, 소련이 베를린과 프랑스에서 운용했던 스파이망인 붉은 오케스트라(Red Orchestra)의 지휘자 레오폴드 트레퍼(Leopold Trepper)도 유사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또한 트레퍼의 조직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독일의 반 나치 단체인 슐츠-보이센/하르낙 그룹(Schultze-Boysen/Harnack Group)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 적국이 된 영국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임박했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호들은 지속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조르게는 숙청의 위협을 감지하고 소련의 귀국 명령을 회피하고 있던 상태엿으며, 트래퍼의 정보는 독일의 역정보로 치부되었다. 슐츠-보이센/하르낙 그룹은 친소 조직이라기 보다는 반 나치 조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완전한 신뢰를 얻고 있지 못했으며, 영국과 같은 서방국가들에 대한 스탈린의 의심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 정보를 분석/가공하기 보다는 수집에 주력하고 최종 의사결정은 권력자에게 맡기는 소련 정보당국의 전통과 모든 것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희망하던 스탈린의 독재 스타일도 이런 정보들이 무시되는 한 요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이러한 경고를 전적으로 무시했다고 볼 수도 없다. 사실 그 당시 스탈린에게 가장 필요했던 자원은 바로 '시간'이었다. 양적으로 급속한 팽창을 이루어내긴 했지만, 붉은 군대가 완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비록 소련이 보유한 24,000 대의 전차가 독일의 전차 4,500 대를 수적으로 압도하고는 있었지만 잘 조직되고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진 독일과 상대하려면 아직은 시간을 더 벌어야만 했다. 이런 판단하에 스탈린은 이른 시기에 독일과의 무력충돌을 촉발할 수도 있는 독일군을 향한 적대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한편 폴란드로 진주하여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소련군도 점증하는 독일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의 고공 정찰기들은 1939년 10월 부터 독소전 개전까지 약 700회 이상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정찰기가 소련 영토에 추락한 2건의 사고가 있었는데 이 기체에서 회수한 카메라에서 현상된 사진들은 소련의 군사시설과 주요 교통로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소련의 대공포들의 독일 공군기에 대한 발포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게다가 1941년 봄이 되자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과 1939년의 폴란드 침공 당시의 전사자들의 시체를 탐색한다는 명목으로 소련 국경 안 쪽의 수색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역시 승인되었으며, 전선의 소련 지휘관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수색대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형정찰을 실시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던 지하단체인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 조직 (OUN, Orhanizatsiya Ukrayins’kykh Natsionalistiv)으로부터도 각종 정보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독일의 수상한 행동이 빈번하게 관찰되면서 어찌됬건 1941년 1월이 되면 내정인민위원회(NKVD) 및 참모본부 첩보총국(GRU)도 독일의 침공에 대한 충분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 서부국경을 향한 독일군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되고 있었으며, 인민 국방위원 티모셴코(Timoshenko)는 독일의 기습에 대비한 각 군관구의 작전 개요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하달한다.
또한 1941년 3월 27일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개시되자 국방위원 티모셴코와 참모부장 주코프는 합동으로 스탈린에게 소총사단의 인원을 전시 완전편제 수준으로 강화하자는 기안을 제출한다. 처음에 스탈린은 이러한 조치가 독일을 자극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시했으나 결국 3월말 이를 허용하게 된다. 새로 소집된 병력의 훈련은 5월 부터 10월 까지 순차적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번 연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상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5월 중순경 모스크바로 부터의 지령에 의해 키예프 특별 군관구는 북코카서스 군관구로부터 제34 소총군단을, 극동 지방으로 부터는 제31 소총군단을 수령하는 보강조치가 실시된다. 이렇게 군관구로 새로운 부대들의 배속이 진행되며 군관구 지휘관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휘하 부대에 대한 검열과 함께 기계화 군단의 기동연습을 참관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실시된 주/야간 행군, 사격, 장애물 돌파 등에서 아직은 미숙한 소련의 전차 승무원들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이에대한 시정조치를 지시함과 동시에 제2선에 배치된 부대들의 전투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후방 저장고에 저장되어 있던 탄약, 수류탄, 포탄 등의 절반이 예속된 부대에 배분되기 시작했으며, 모든 차량들은 1회 이상 재보급이 가능한 연료를 각종 용기에 저장하여 적재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참모본부에서 도달한 전신은 이 명령을 즉각 취소하며, 방어선을 점령한 부대들은 즉시 원 주둔지로 돌아가라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아마 국경지대에 배치된 NKVD는 독일을 자극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없도록 보장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움직임을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신의 군관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 과도한 조치로 인해서 스탈린의 눈 밖에 나기도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의 방어 강화를 위한 움직임은 중지되었으나, 그의 부하들은 비밀리에 그들 나름대로의 준비를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키르포노스에게 언제 자신들이 요새 지역을 점령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했으나 키르포노스는 확답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며, 단지 모스크바도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을거라면서 그들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됬건 독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제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으며, 독일의 침공이 임박한 41년 6월 19일이 되자 주코프로 부터 키예프 특별 군관구에 도착한 전신은 국방위원 티모셴코가 키예프 특별 군관구를 전시체제인 남서전선군으로 개칭하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틀 후 1941년 6월 21일 우크라이나 국경지대로 넘어온 독일의 귀순자는 독일의 침공이 다음 날 03시 30분에 개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정보는 즉각 모스크바로 전송되었으며, 독일과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자 최근 18시간 이상의 격무를 수행하며 종종 사무실의 소파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던 티모셴코와 주코프가 이를 즉시 스탈린에게 보고하였고 그는 이 둘을 즉각 크레믈린으로 소집하였다.
스탈린은 티모셴코와 주코프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냐고 질문했으며,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그해 2월에 작성되었던 '동원계획 1941년'의 즉각적인 발동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 계획을 발동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티모셴코, 주코프, 그리고 인민 국방위원회(NKO, Narodnyi Kommissariat Oborony) 작전과의 바투틴 장군 3명은 다른 방에 들어가 원안에서 완화된 동원 계획을 작성하였으며 스탈린은 이를 승인하였다.
바투틴이 이 계획을 참모본부에 들고가 각 국경지역의 산하 부대에 전송을 완료한 시각은 41년 6월 22일 00시 30분, 바바로사 작전개시 불과 3시간 전이었다.
휴, 간단히 쓸려고 했는데 다소 길어졌군요...-_-;;
어찌됬건 다음 포스팅 부터는 독일과 소련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됩니다.....^^
[참조자료]
The Bloody Triangle: The Defeat of Soviet Armor in the Ukraine, June 1941, Victor Kamenir, 51~71 p
예정대로 이번에는 독소전 개전 직전,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에서 급박히 돌아갔던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어지는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히틀러와 독일의 고위 장성들이 바바로사 작전을 입안할 당시 그들은 국경지대에 집결하게될 대규모 병력들이 장기간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병력의 집중과 이를 수송하게될 철도차량의 움직임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감추어야 할 것은 병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병력들이 모인 이유가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 동부에 집결되고 있던 독일의 대규모 병력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영국 공군의 행동 범위에서 벗어난 곳에서 부대들의 재편과 휴식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1940년 10월 12일 공식적으로 취소된 바다사자 작전(Unternehmen Seelöwe)에 대한 훈련이 1941년 봄부터 다시 재개되었으며, 영국 정찰기의 감시가 가능한 장소에서 실시된 육상부대의 훈련과 동시에 독일 공군의 정찰기들은 순전히 그들의 적의 눈에 띄기 위하여 영국 상공으로의 출격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 그냥 한 번 영국 찍고 오자꾸나~ ]
그러나 이러한 독일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바바로사 작전의 준비는 곧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소련에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도 독일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으며, 소련이 베를린과 프랑스에서 운용했던 스파이망인 붉은 오케스트라(Red Orchestra)의 지휘자 레오폴드 트레퍼(Leopold Trepper)도 유사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또한 트레퍼의 조직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독일의 반 나치 단체인 슐츠-보이센/하르낙 그룹(Schultze-Boysen/Harnack Group)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 적국이 된 영국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임박했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호들은 지속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조르게는 숙청의 위협을 감지하고 소련의 귀국 명령을 회피하고 있던 상태엿으며, 트래퍼의 정보는 독일의 역정보로 치부되었다. 슐츠-보이센/하르낙 그룹은 친소 조직이라기 보다는 반 나치 조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완전한 신뢰를 얻고 있지 못했으며, 영국과 같은 서방국가들에 대한 스탈린의 의심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 정보를 분석/가공하기 보다는 수집에 주력하고 최종 의사결정은 권력자에게 맡기는 소련 정보당국의 전통과 모든 것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희망하던 스탈린의 독재 스타일도 이런 정보들이 무시되는 한 요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이러한 경고를 전적으로 무시했다고 볼 수도 없다. 사실 그 당시 스탈린에게 가장 필요했던 자원은 바로 '시간'이었다. 양적으로 급속한 팽창을 이루어내긴 했지만, 붉은 군대가 완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비록 소련이 보유한 24,000 대의 전차가 독일의 전차 4,500 대를 수적으로 압도하고는 있었지만 잘 조직되고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진 독일과 상대하려면 아직은 시간을 더 벌어야만 했다. 이런 판단하에 스탈린은 이른 시기에 독일과의 무력충돌을 촉발할 수도 있는 독일군을 향한 적대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 니들이 내 속을 알어~? ]
한편 폴란드로 진주하여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소련군도 점증하는 독일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의 고공 정찰기들은 1939년 10월 부터 독소전 개전까지 약 700회 이상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정찰기가 소련 영토에 추락한 2건의 사고가 있었는데 이 기체에서 회수한 카메라에서 현상된 사진들은 소련의 군사시설과 주요 교통로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소련의 대공포들의 독일 공군기에 대한 발포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게다가 1941년 봄이 되자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과 1939년의 폴란드 침공 당시의 전사자들의 시체를 탐색한다는 명목으로 소련 국경 안 쪽의 수색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역시 승인되었으며, 전선의 소련 지휘관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수색대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형정찰을 실시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던 지하단체인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 조직 (OUN, Orhanizatsiya Ukrayins’kykh Natsionalistiv)으로부터도 각종 정보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독일의 수상한 행동이 빈번하게 관찰되면서 어찌됬건 1941년 1월이 되면 내정인민위원회(NKVD) 및 참모본부 첩보총국(GRU)도 독일의 침공에 대한 충분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 서부국경을 향한 독일군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되고 있었으며, 인민 국방위원 티모셴코(Timoshenko)는 독일의 기습에 대비한 각 군관구의 작전 개요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하달한다.
또한 1941년 3월 27일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개시되자 국방위원 티모셴코와 참모부장 주코프는 합동으로 스탈린에게 소총사단의 인원을 전시 완전편제 수준으로 강화하자는 기안을 제출한다. 처음에 스탈린은 이러한 조치가 독일을 자극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시했으나 결국 3월말 이를 허용하게 된다. 새로 소집된 병력의 훈련은 5월 부터 10월 까지 순차적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 일단 모이고 볼일~ ]
여기서 잠시 이번 연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상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5월 중순경 모스크바로 부터의 지령에 의해 키예프 특별 군관구는 북코카서스 군관구로부터 제34 소총군단을, 극동 지방으로 부터는 제31 소총군단을 수령하는 보강조치가 실시된다. 이렇게 군관구로 새로운 부대들의 배속이 진행되며 군관구 지휘관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휘하 부대에 대한 검열과 함께 기계화 군단의 기동연습을 참관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실시된 주/야간 행군, 사격, 장애물 돌파 등에서 아직은 미숙한 소련의 전차 승무원들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이에대한 시정조치를 지시함과 동시에 제2선에 배치된 부대들의 전투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후방 저장고에 저장되어 있던 탄약, 수류탄, 포탄 등의 절반이 예속된 부대에 배분되기 시작했으며, 모든 차량들은 1회 이상 재보급이 가능한 연료를 각종 용기에 저장하여 적재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참모본부에서 도달한 전신은 이 명령을 즉각 취소하며, 방어선을 점령한 부대들은 즉시 원 주둔지로 돌아가라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아마 국경지대에 배치된 NKVD는 독일을 자극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없도록 보장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움직임을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신의 군관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 과도한 조치로 인해서 스탈린의 눈 밖에 나기도 원하지 않았다.

[ 키르포노스 상장(上將) ]
이렇게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의 방어 강화를 위한 움직임은 중지되었으나, 그의 부하들은 비밀리에 그들 나름대로의 준비를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키르포노스에게 언제 자신들이 요새 지역을 점령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했으나 키르포노스는 확답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며, 단지 모스크바도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을거라면서 그들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됬건 독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제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으며, 독일의 침공이 임박한 41년 6월 19일이 되자 주코프로 부터 키예프 특별 군관구에 도착한 전신은 국방위원 티모셴코가 키예프 특별 군관구를 전시체제인 남서전선군으로 개칭하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틀 후 1941년 6월 21일 우크라이나 국경지대로 넘어온 독일의 귀순자는 독일의 침공이 다음 날 03시 30분에 개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정보는 즉각 모스크바로 전송되었으며, 독일과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자 최근 18시간 이상의 격무를 수행하며 종종 사무실의 소파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던 티모셴코와 주코프가 이를 즉시 스탈린에게 보고하였고 그는 이 둘을 즉각 크레믈린으로 소집하였다.
스탈린은 티모셴코와 주코프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냐고 질문했으며,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그해 2월에 작성되었던 '동원계획 1941년'의 즉각적인 발동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 계획을 발동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티모셴코, 주코프, 그리고 인민 국방위원회(NKO, Narodnyi Kommissariat Oborony) 작전과의 바투틴 장군 3명은 다른 방에 들어가 원안에서 완화된 동원 계획을 작성하였으며 스탈린은 이를 승인하였다.
바투틴이 이 계획을 참모본부에 들고가 각 국경지역의 산하 부대에 전송을 완료한 시각은 41년 6월 22일 00시 30분, 바바로사 작전개시 불과 3시간 전이었다.
휴, 간단히 쓸려고 했는데 다소 길어졌군요...-_-;;
어찌됬건 다음 포스팅 부터는 독일과 소련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됩니다.....^^
[참조자료]
The Bloody Triangle: The Defeat of Soviet Armor in the Ukraine, June 1941, Victor Kamenir, 51~71 p
# by | 2009/07/12 21:54 | Советский танк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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