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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raine, June 1941 - 개전전 소련의 상황

 

전 포스팅에서 간략히 살펴본 독일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주역인 남부 군집단 (Heeresgruppe Süd) 소속 제6군, 그리고 제1 기갑집단(Panzergruppe 1)의 계획 및 편제에 이어서 오늘은 소련측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방 세계의 모든 전차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차를 이미 보유하고 있던 소련!

과연 그들은 그에 걸맞는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을까요? 아마 대답은 No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미 알려진 내용이 많이 반복되는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일단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어지는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탈린의 대규모 군 숙청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탈린은 군부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대규모 군 숙청을 실시한다.
1937년 6월 11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체포로 시작된 숙청의 희생자들은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었으며, 본인 뿐 만 아니라 아내, 형제 자매들, 친구, 그리고 성인이 된 자녀들 까지 광범위한 체포가 이루어졌다. 또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자녀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5명의 원수 중 3명, 군 지휘관 15명 중 13명, 군단 지휘관 85명 중 57명을 포함 전체 장성들의 90%, 영관급 지휘관의 80%가 숙청 되고 그 희생자는 35,000 명에 달하는 이 사건은 소련 군부에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쥬코프(Zhukov) 원수는 후일 회상록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소련의 인민들과 공산당은 정치 지도자의 근거없는 의심으로 인해 막대한 댓가를 치러야만 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회의와 대화까지도 피하려고 했다. 만약 꼭 필요한 경우에는 증인으로서 제3자가 입회한 가운데 대화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 "밀고는 전염병처럼 광범위하게 번져나갔다. 종종 아무런 죄가 없는 진실한 사람들도 가까운 친구들에 의해 밀고당했으며,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충성심이 의심받을까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될 뿐이었다."


여기서 언급된 밀고는 종종 자신의 출세를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제3 기병 군단 예하의 사단장으로 근무중이던 쥬코프(Zhukov)도 자신의 군단장이 체포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 자신도 군단 정치장교(commissar) 니콜라이 영(Nilkolai Yung)에 의해 그의 딸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등의 누명을 쓰기도 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의 위기는 그를 고발했던 정치장교 자신이 또한 체포됨으로서 끝나게 된다.

[ 꽤 다혈질인 성격인데 그 당시에는 많이 참았던 쥬코프 ]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 제3 기병 군단장으로 발령받은 쥬코프는 불과 몇 주 만에 현저히 떨어진 전투 태세를 목격하게 되었다.


한편 군 숙청으로 인해서 경험있는 장교들의 수 만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동안 소련이 쌓아왔던 군사과학의 지식체계도 매우 큰 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하여 예고로프(Yegorov), 카메네프(Kamenev), 스베친(Svechin) 등 소련 군사 사상의 혁명적인 진보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주요 인물들도 거의 예외없이 숙청의 대상자 였으며, 특히 소련 참모 학교(General Staff Academy)의 교수진들은 말 그대로 전멸 되었다.

대규모 숙청으로 인해 생겨난 지휘 체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단숨에 계급 몇 계단을 뛰어 넘는 승급이 이루어 졌다. 이로 인해 아직 젊고 미숙한 장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직책을 맡아야만 했다. 이는 야전 부대의 초급 장교들로 부터 군 수준의 고위 장교들까지 그 예외가 없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군 조직의 급격한 확장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소련 군조직의 급격한 확장

 1937년 150만 수준이었던 소련군의 규모는 개전 직전인 1941년 6월 까지 520만 으로 급격히 팽창하게 된다. 경험있는 하사관은 고사하고 장교들의 절대적인 수 자체가 부족했으며, 이는 군 숙청의 영향과 맞물려 더욱 심각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1939년~1940년 동안 174,000 명의 예비역 장교들이 소집되었으며, 1940년에 42개소의 군사학교를 신설하고 커리큘럼을 3년에서 2년으로 축소하는 등의 조치로 군사학교 학생수는 36,000 명에서 168,000 명으로 증가했다.

1941년 5월 당시 키예프 특별 군관구(Киевский военный округ) 만으로 약 30,000 명의 장교 및 기술 인력들이 부족하다고 파악되었으며, 당해 5월에 군사학교를 졸업할 초급 장교들이 이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소속 부대에 도착한 것은 독소전 개전 불과 며칠전이었고, 자신의 임무와 부대원들에 익숙해질 기회도 없이 그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말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이 지휘관의 부족은 초급 장교들 뿐 만 아니라 고위 지휘관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독소전 개전 당시 키예프 특별 군관구(Киевский военный округ)의 지휘관인 키르포노스(Mikhail P. Kirponos) 상장도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이며, 핀란드와의 겨울 전쟁에서 제70 소총 사단을 지휘했던 키르포노스 상장(上將)은 겨울 전쟁에서 다른 소련 지휘관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이 공로로 소련 영웅 메달을 수여받았다.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으로 인해 생긴 공백을 메꾸기 위해 그는 1940년 4월에는 소총 군단의 지휘관으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불과 3개월 후에는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상장(上將)의 지위로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비록 그는 사단장으로서 훌륭한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군관구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지는 검증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특히 독소전 개전 이후에 그로서는 최고사령부 Stavka 내지는 정치장교의 절대적인 압박에 순종 하는 것 외 다른 방법을 찾기는 힘들었다.  

[ 키르포노스 상장(上將), 1941년 9월 키예프 방어전에서 전사 ]


소련 기계화 군단의 상황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체포와 함께 부정된 종심 작전(Deep Operation) 교리, 그리고 스페인 내전, 노몬한 전투, 폴란드 분할 점령 등에서 보여진 기계화 부대의 실망스러운 실적으로 인하여 소련의 기계화 군단은 해체되었다. 그리고 전차는 대대 내지는 여단 규모로 편성되어 보병 지원 임무에 투입되게 된다.

그러나 소련 기계화 군단의 해체가 시작된 바로 그 직후 소련의 고위 지휘관들은 독일의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전차의 집단 운용을 목격하고 기계화 군단의 편제를 복구하기 시작한다. 1940년에 당장 8개의 기계화 군단이 창설되었으며, 그 다음 년도에는 추가로 22개의 기계화 군단을 창설하겠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편제 및 장비표(TO&E)에 따르면 각 기계화 군단은 1,031대의 전차를 보유하며, 여기에는 420대의 T-34와 126대의 KV 전차가 포함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한 중공업 육성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이는 당시 소련의 생산력을 뛰어넘는 목표였다. 다시말해서 이는 당장 16,600 대의 신형 전차와 함께 총 수 32,000 대의 전차를 1년 안에 갖추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T-34의 경우를 예로 들면 1940년 7월 생산이 시작된 T-34는 1941년 6월 까지 비록 인상적인 숫자이긴 하지만 소련의 야심찬 목표를 채우기에는 부족한 1,225대 만이 생산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소전 개전 당시 위의 편제를 갖춘 소련 기계화 군단은 단 한개도 없었으며, 같은 이름의 기계화 군단이라고 해도 그 전력은 천차만별이었다.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제4, 제8 기계화 군단은 각각 100 여대의 신형 T-34 및 KV 전차를 포함한 900 여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제9, 제19 기계화 군단은 T-26 및 BT 전차로 구성된 300 여대의 전차만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소련의 전차 군단의 전차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T-26 및 BT 전차는 비록 45mm 포를 장착하여 독일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화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 장갑은 소화기 및 탄편 방어가 가능한 수준이었을 뿐으로 독일의 37mm 대전차 포로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또한 T-26중 일부는 두개의 기관총 포탑을 장비한 구식 모델이었으며, BT 전차의 경우 BT-2, 5, 7 등의 모델 변경으로 인해 특히 구형 모델의 경우 예비 부품을 구하기가 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실전 운용이 곤란한 전차들은 훈련용으로 쓰이거나, 차량 집합소에 세워진 체 부품을 떼어내어 다른 전차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차들도 총 편제수를 맞추기 위해서 서류상으로는 보유전차 총 수에 포함되어 있었다.

[ 구형 T-26 모델, 두 개의 기관총 포탑을 장비 ]

[ BT 고속전차의 훈련 중 모습 ]

포병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이동 수단에 심각한 약점이 있었다. 당시 독일도 마찬가지 였지만 소련 포병의 상당수는 말에 의해 견인되었으며, 게다가 견인용 마필의 숫자 자체가 부족해서 전시에는 민간 부문에서의 동원이 필요했다. 일부 중포(重砲)는 트랙터에 의해 견인되도록 계획되었으나 역시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각종 지원 부대들도 기갑 전력의 급격한 확장에 발맞추어 규모의 확대가 필요했으나, 그 편성은 실질적인 증강없이 단지 서류상으로 확대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통신중대의 경우 통신대대로 확장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병들의 충원은 이루어졌으나 장교 및 하사관, 그리고 통신 장비 및 이동 수단의 확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서 줄이고, 다음 포스팅에서는 키예프 특별 군관구(Киевский военный округ)의 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To be continued -


[참조자료]

The Bloody Triangle: The Defeat of Soviet Armor in the Ukraine, June 1941, Victor Kamenir, 9~24 p
Soviet Military Operational Art, In Pursuit of Deep Battle, David M. Glantz, 94~97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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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 | 2009/05/24 13:13 | Советский танк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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